'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고독하려면 과거에 대한 모든 것들을 버려야만 한다.
당신이 완전히 고독할 때 국외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천진스러우며
이러한 천진성으로 슬픔에서 해방될 수 있다"
어떤 억압의 고통도, 어떤 틀에 맞추는 잔혹한 훈련도 진리로 안내하지 못했다. 진리와 만나려면 마음은 한 점의 뒤틀림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정말 자유를 원하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자유를 말할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불편하거나 불쾌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고통스럽거나 추악한 기억과 불행한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이데올로기, 신조, 관계들은 그대로 지니고 유지한다. 그러나 고통 없이 쾌락만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일이다. 만일 우리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유의 본질과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순응, 또 다른 형태의 지배를 가져오게 될 또 하나의 반응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일런의 반응들을 가질 수 있고 각 반응을 자유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매달리는 변형된 과거의 연속일 따름이다.
모든 시대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젊은이들은 사회에 저항하며 , 그것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저항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저항할 때 그것은 하나의 대응이고 이 대응은 그것 자체의 패턴을 세워 당신은 그것이 뭔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틀 속의 낡은 것이다. 어떤 사회적, 정치적 저항도 결국 무척 낡은 부르주아의 정신 생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유는 저항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보거나 행동할 때에만 온다. 보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며 그 행동은 당신이 위험을 볼 때처럼 즉각적인 것이다. 그래서 거기엔 어떠한 두뇌 작용도, 토론도, 주저도 없다. 그 위험 자체가 행동하게 만들고 그래서 보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자유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의식, 모든 걸 회의하고 질문하는 자유이며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지붕적이고 능독적이고 활기에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의존, 예속, 순응, 수락을 내던진다. 그런 자유에는 완전히 혼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완전히 고독하고 아무 리더십도 전통도 권위도 없는 그런 자우를 찾을 수 있을까?
이 고독은 어떤 자극이나 지식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체험이나 결정의 결과도 아닌 마음의 내적 상태다. 우리들 대부분은 결코 내적으로 고독하지 않다. 스스로 격리, 절연라는 고립과 고독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고립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아픔을 당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기 둘레에 벽을 쌓고 또 다른 형태의 괴로움인 이탈을 도모하며, 이데올로기의 허황된 상아탑 속에 사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고독은 이것과 아주 다르다. 당신은 기억으로 가득 차고, 제약투성이이며, 어제의 투덜거림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결코 고독하지 않다. 고독하려면 과거에 대한 모든 것들을 버여야만 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했던 말들과 불행한 기억들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고독이며 고독한 마음은 순진할 뿐만 아니라 젊고 천진하다 또 그런 마음만이 진실한 것을 알며 말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안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당신은, 당신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나 이러저러했던 바가 아니라 ,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유는 원망, 소원, 갈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연스럽게 올뿐이다.
자유를 만나려면 마음은 삶을 바라보는 법을 알아야 하며, 이것은 시간의 속박 없이, 의식의 영역 너머에 있는 자유를 향한 거대한 몸짓인 것이다.